[E 사람] 미국 50여개 도시 상영 영화 '마더' 감독-봉준호, "김혜자씨 히스테릭한 연기에 전율 느껴"
영화 ‘마더’의 북미 개봉을 앞두고 LA를 방문한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이미 뉴욕, 보스턴, 워싱턴DC 등에서 주류 언론과의 인터뷰만 80여회를 소화했다고 혀를 내두르던 그는 “오랜만에 한국말로 하니까 좋다”며 ‘재연’까지 섞어가며 신나고 진지하게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김혜자, 원빈 주연의 스릴러 드라마 ‘마더’는 오는 12일부터 미국 50여개 도시에서 상영된다. -감독이 직접 소개하는 ‘마더’는 어떤 영화인가. “전작에 의지해 소개한다면 ‘엄마가 괴물이 되는 얘기’, 혹은 ‘괴물같은 엄마 얘기’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엄마’를 ‘사랑’과 동일시하면서, 얘기만 나와도 눈물부터 흘린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살인사건이라는 극단의 상황을 통해 엄마가 갈 수 있는 극한이 어디인가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겁내지 않고 보여주려 했다.” -어디서 영감을 받아 ‘마더’를 쓰게 됐나. “우리 어머니의 영향을 좀 받았다. 물론 사람을 죽이시거나 그런 것은 절대 아니지만, 미리부터 걱정하시거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안절부절 하시는 경향이 있으셨다. 또 한 가지, 몇 년 전 봤던 충격적 인터뷰 클립이 있었다. 서울의 한 60대 후반 노인이 중국이나 연변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을 입양했다 성추행을 한 후 파양하다 적발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헌데 단칸방에서 같이 살던 범인의 노모가 한 인터뷰에서 ‘우리 착한 아들이 오갈데 없는 것들 보살펴줬는데, 배은망덕한 천하의 요물들이 아들을 욕보이고 누명을 씌웠다’며 ‘모두 잡아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뛰더라. 참 웃기면서도 섬뜩하고 슬펐다. 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경계조차 없는 듯 했고, 알더라도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것만 같은, 굉장히 본능적인 ‘엄마’의 모습을 봤다. 그 잔상이 ‘마더’의 시나리오를 쓸 때 굉장히 많이 남아 있었다.” -주인공으로 김혜자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아까 말한 그 느낌이나 이미지를 가장 막강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게 김혜자 선생님이었다. 내가 ‘변태’라서 그런지 그 동안 TV를 통해서도 ‘국민엄마’의 모습보단 어둡고 예민한 모습, 가끔씩 히스테리를 부리는 듯한, 약간 정신이 딴 데 가 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모습이 많이 보이더라. 그게 너무 좋았다.” -함께 작업해 보니 어땠나. “실제로도 내가 본 모습 그대로시더라.(웃음). 정말 탁월한, 천재적인, 동물적인 배우였다. 배우는 훈련을 통해서 되는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송강호씨랑 일하면서도 느꼈는데, 감독이나 프로듀서는 길가는 행인을 실미도에 붙잡아 놓고 2~3년 훈련시키면 어느 정도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배우는 훈련의 영역을 넘어서는 존재다. 김혜자 선생님이 전형적인 예다. ‘내가 뭘 하고 싶다’ 마음의 세팅이 되면 주저함이 없었다. 신인배우처럼 ‘마더’에 임해주셨고, 그 에너지에 젊은 스태프들이 쫓아가느라 헉헉댈 정도였다.” -김혜자의 연기가 가장 빛났던 장면을 꼽는다면. “예고편에도 나왔던,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내 아들이 안 그랬거든요’하는 장면이다. 찍고 나서 너무 놀라 ‘선생님 선생님, 이거 완전 압권이에요. 와서 보세요’ 하며 모니터를 보여드렸더니 ‘어머 어머, 내 눈이 왜 이래, 이거 안 쓰면 안 돼요? 너무 무서워’ 하시며 본인도 놀라셨다. ‘이렇게 하면 놀라겠지’하며 계산하고 신체를 컨트롤해서 나온 장면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몰입해 감정이 폭발을 일으키니 신체가 거기에 자연히 따라가는 김혜자 선생님의 연기 패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의 특수한 사회적 맥락이 많이 그려지는데도 불구하고 시사회때 외국 관객들이 굉장히 많이 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칸느나 토론토에서도 많이들 웃더라. 미국에서도 ‘변함없이 괴상한 블랙 유머들이 많이 나온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오히려 한국 관객들이 좀 경직된 자세로 영화를 받아들인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인터뷰마다 나와 너무 두 눈 부릅뜨고 ‘극한까지 갑니다!’해서 그런가보다. 익스트림한 영화이긴 하지만 예고편이나 마케팅이 너무 엄청난 스릴러처럼 포장된 면도 있었다. ‘살인의 추억’, ‘괴물’등에서 쭉 함께 작업했던 송강호란 배우의 있고 없음의 차이도 있었다. 한국 관객은 영화를 볼 때 ‘배우의 유머’를 많이 본다. 송강호가 나오면 일단 웃을 준비부터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지만 외국 관객은 ‘감독의 유머’를 본다. 그 부분에서 차이가 좀 있었다. 또 외국 관객들이 한국의 특수한 사회적 분위기나 문화에 대해서도 이제 제법들 짐작을 하는 듯 하다. 소위 ‘필름고어’라는 사람들은 90년대 말부터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 박찬욱의 영화는 줄줄이 꿰고 있다 보니, 그런 디테일과 한국적 로칼리티에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단 느낌도 받았다.” -영화를 만들 때 외국 관객 염두에 두나. “나 좋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데도 너무 바쁘다. ‘외국 관객들이 헷갈리거나 모르지 않을까’하는 건 의식할 여유조차 없다. 간혹 자막을 넣다 보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부딪힐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걸 겁내진 않는다. 꼭 넣고 싶은 디테일인데, 외국 관객 생각해 빼는 일은 절대 없다. 이해하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내가 뭘 하고 싶은지가 훨씬 중요하다. 또 그렇게 계속 하다 보면, 외국 관객도 자연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뉴욕에 한 번도 안 가본 사람도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고 뉴욕을 대충 상상할 수 있듯 말이다.” -‘괴물’이나 ‘마더’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진행은 어떻게 돼 가나. “‘괴물’은 유니버설 스튜디오, 프레드릭 본드 감독이 붙어 잘 진행이 되고 있다더라. ‘마더’는 칸느 때부터 ‘메릴스트립 주연으로 리메이크 해야 된다’며 얘기는 많았는데, 아직 진전은 없다. 요새 보면 할리우드에서 한국영화나 콘텐츠를 정말 많이 사가고 있다. 그만큼 할리우드의 크리에이티브가 많이 고갈된 것 같다. 자국 콘텐츠가 바닥이 나니 한국이나 일본, 프랑스의 영화나 만화 등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다. 우린 그냥 하던데로 할 뿐인데 말이다. 솔직히 미국쪽 에이전트가 보내주는 할리우드 시나리오를 보면, 우리끼리 얘기지만 정말 한심한 것들이 많다. 헌데 그런 시나리오들이 반 년쯤 지나면 정말 유명한 감독, 배우가 붙어서 제작되고 있더라. 이래서 할리우드를 ‘공장’이라고 하는 것 같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막 쓰고, 막 찍고, 막 연기하고. 이곳의 장점이자 단점인 듯 하다.” -좋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할리우드에서도 직접 연출을 해 볼 생각이 있나. “에이전트를 통해 살포되는 할리우드쪽 시나리오 중엔 수준 있는 작품을 만나기란 힘든 것 같다. 물론 프로듀서가 직접 찾아와 진지하게 연출을 의뢰한 적도 있긴 하지만, 티끌만한 것도 내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데다 은근 소심한 스타일이라 과연 될까 싶다. 워낙 프로듀서나 스튜디오의 힘이 센 동네 아닌가. 오우삼 감독도 최근까지 최종 편집 때문에 신경전이 장난 아니었다던데, 나같이 처음 온 감독에게 파이널 컷 권한을 줄 것 같진 않다. 신중히 생각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파이널 컷과 각종 컨트롤 권한이 보장된다면, 꼭 해보고 싶기도 하다. 미국 뿐 아니라 일본, 프랑스 등 다른 시스템을 갖춘 곳에서 영화를 만들어 보는 데도 관심은 있다.” -차기작인 ‘설국열차’의 진행상황은 어떤가. “열심히 쓰고 있다. 올 한 해는 시나리오 쓰고 프리프로덕션 하고, 내년부터 촬영해서 내년 말이나 2012년에 개봉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본, 프랑스, 미국 제작사들의 관심이 높은 데다 예산 규모가 커서 국제적인 공동 투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배우들도 여러 나라 여러 인종이 믹스될 것 같고, 영어 대사가 50% 정도 될 듯 싶다. 제작자이신 박찬욱 ‘사장’께서 잘 결정하시리라 본다.(웃음)” 글=이경민 기자 사진=신현식 기자